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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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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李仲燮)
1916~1956
한국 근대서양화의
대표 화가

1910년대
1916
9월 16일 평남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태어남.
1920년대
1923
평양의 이문리에 있는 외가로 나와 평양 종로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함. 김병기와 시인 양명문이 동기. 학교에선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소문이 남.
1929
평양고보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정주로 내려가 오산학교에 입학함. 영어와 미술을 가르치는 임용연이 부임하면서 그의 영향을 받음. 당시 오산학교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교사·강사들이 많아 이중섭은 이들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음.
1930년대
1935
일본으로 건너가 사립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 그러나 곧 싫증을 느끼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문화학원 미술과에 입학함. 평양 종로보통학교 시절 친구인 김병기와 오산학교 선배인 문학수가 선배로 재학 중이었음.
1938
1937년에 창립된 <자유미술가협회>전 2회전 공모에 출품하여 협회상을 수상함. <자유미술가협회>은 당시 일본 화단에서 가장 전위적인 단체로 추상미술의 거점으로 인식됨.
1940년대
1940
문화학원 졸업. 계속 일본에 머물면서 <자유미술가협회>에 <서 있는 소>, <망월>, <소의 머리>, <산의 풍경>을 출품. 연말에 원산으로 돌아옴.
1941
동경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신미술가협회>전 창립전에 가담. 창립전에 출품. 제5회 <자유미술가협회>에 <망월>, <소와 여인>을 출품, 회우로 추대.
1942
제6회 <자유미술가협회>에 회우로서 <소와 아이>, <봄>, <소묘> 등을 출품. 당시 한국인 회우로는 김환기, 유영국, 문학수 등이 있었음. 이 무렵부터 호를 대향으로 쓰기 시작함.
1943
제7회 <자유미술가협회>에서 특별상 태양상을 수상함.
1944
평양 체신회관에서 김병기, 문학수, 황염수, 윤중식 등과 6인전.
1945
5월 문화학원 시절 사귀었던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가 최후의 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와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림. 아내 이름을 한국식으로 이남덕(李南德)으로 지었음. 해방기념 미술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서울에 왔으나 늦어서 출품하지 못하고 최재덕과 미도파 벽화 제작에 참여함.
1946
조선조형예술동맹 가입.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일주일 만에 그만 두고 집에서 닭을 키우면서 주로 닭과 소를 많이 그림. 친구인 구상의 시집 <응향>이 반동적이란 내용으로 지탄을 받자 구상은 그 길로 월남을 단행하였고, 시집의 표지를 그린 이중섭이 한동안 고초를 겪었음.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디프테리아로 사망함.
1947
평양에서 열린 8·15 기념전에 출품한 작품이 소련의 평론가로부터 호평을 받음. 아들 태현 출생.
1949
차남 태성 출생, 당시 원산의 이중섭 집에는 화가 김민구, 김영주, 그리고 금강산 온정리에 있었던 한묵과 강원 금성의 박수근이 자주 방문하여 친교를 가짐.
1950년대
1950
한국전쟁이 일어남.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됨. 겨울로 들어서면서 전세가 역전되어 유엔군의 수송선을 타고 월남함. 부인과 두 아들 그리고 장조카인 이영진을 대동하고 부산에 도착함.
1951
임시 수용소에서 나와 가족을 데리고 제주 서귀포에 도착. 이 곳에서 <서귀포의 환상>, 두 점의 <섶섬이 보이는 풍경>, <바닷가와 아이들> 등을 그림. 약 1년여를 보내고 12월에 다시 부산으로 나와 오산학교 동창의 도움으로 범일동의 판잣집에서 생활하게 됨.
1952
국방부 해군 종군 화가단에 가입.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보냈다가 나중에 일본인 송환선을 타고 친정으로 감. 이 때부터 이중섭은 가족을 그리는 나날을 보내게 됨. 은지화 기법을 착안. 박고석, 손응성, 한묵과 함께 <기조전>을 형성 전시를 함.
1953
동란으로 인해 중단되었던 <신사실파>에 가담, 회원으로 출품. 주변에서 마련해 준 선원증으로 일본에 건너가 가족과 상봉. 그러나 일주일 만에 다시 돌아옴. 통영에 머물렀던 유강열의 주선으로 통영에 와서 한 동안 머물면서 제작에 임함. 성림다방에서 개인전을 가짐.
1954
유강열, 장윤성, 전혁림과 4인전 개최, 진주에서 개인전 가짐. 6월 경복궁 국립미술관에서 개최된 대한미술협회전에 <닭> 2점과 <소>를 출품. 7월 천일백화점 개관기념 현대미술 작가전에 출품.
1955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짐. 작품은 적잖게 팔렸으나 제대로 수금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나마 얼마 되지 않은 돈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술로서 다 써 버리고 일본의 가족들을 만나러 가려던 계획은 더욱 어렵게 됨. 친구인 구상의 종용으로 대구에 가서 전시를 열었으나 성과는 신통치 않았음. 이 무렵부터 거식증 같은 일종의 정신질환 증세를 보임. 병세가 호전되어 퇴원해서는 정릉에서 한묵과 자취를 함.
1956
영양부족과 간염으로 다시 거식증 증세가 나타나 청량리 뇌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정신병이 아니란 이유로 퇴원. 적십자 병원 무료 병동에 보내짐. 9월 6일 지켜보는 사람 없이 홀로 숨을 거둠. 향년 41세. 3일 후에야 친구들이 알고 찾아와 장사를 지냄. 화장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됨.
1957
차근호 작가의 묘비가 세워짐.
1960년대
1960
부산 로터리 다방에서 부산의 지우들이 소장하고 있었던 작품들로 최초의 유작전이 열림
1970년대
1972
서울 현대화랑(현재 갤러리 현대)에서 15주기 추모전이 열려 대성황을 이룸. 이를 전후로 하여 이중섭을 테마로 한 영화, 연극 등이 상재되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됨.
1978
건국 30주년 기념훈장 추서.
1980년대
1986
30주기에 즈음하여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대대적인 회고전이 열림. 이중섭의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전개됨.
1990년대
1997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가 이중섭이 피난 와 살던 집을 복원하여 기념관으로 개방하는 한편, 이중섭 거리를 제정. 제주 신라호텔에서 가나아트센터 주최로 이중섭 특별전이 개최됨.
1999
문화관광부가 주관하는 이 달의 문화인물에 선정되어 서울 갤러리 현대에서 이중섭 특별전이 마련됨.
2000년대
2002
이중섭 전시관(서귀포) 개관.
2003
2종 미술관으로 등록. 가나아트센터의 기증 작품으로 <이중섭과 그 친구들>전이 열림.
2004
1종 전문미술관 등록. 갤러리 현대의 기증 작품으로 <이중섭에서 백남준까지>전이 열림.